[미사강론] 새 사제들에게, 교황 “신뢰할 만한 증인이 되십시오. 주인 노릇을 하지 말고 목자로 살아가십시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은 교회와 사제 서품을 받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 그리고 수년간 여러분의 양성 여정을 함께해온 가족과 친구, 동료들에게 큰 기쁨의 날입니다. 사제 서품 예식의 여러 구절에서 강조하듯이, 오늘 우리가 거행하는 사제 직분과 하느님 백성의 관계는 참으로 근본적입니다. 지금 우리가 함께 나누는 거룩한 기쁨, 그 깊이와 넓이, 그리고 지속되는 힘은 서품받는 여러분과 여러분을 낳고 기르며 파견하는 백성 사이에 맺어지고 자라날 유대의 깊이에 따라 결정됩니다. 저는 사제의 정체성이 최고 목자이자 영원한 사제이신 그리스도와의 일치에서 나온다는 점을 마음에 두면서, 이 문제에 대해 잠깐 묵상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 백성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러한 깨달음을 더욱 생생하게 일깨워 주었습니다. 마치 앞으로 다가올 시대, 소속감이 갈수록 약해지고 하느님을 향한 마음이 더욱 메말라갈 그 시대를 내다본 듯합니다. 여러분은 바로 그 증인들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모으시되, 비록 서로 다르지만 하나의 역동적 일치로 이끄시는 일에 결코 지치지 않으신다는 사실의 증인들입니다. 이는 거센 바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엘리야 예언자가 절망에 빠졌을 때 다시금 희망을 불어넣어준 그 부드러운 산들바람과 같습니다(1열왕 19,12 참조). 하느님의 기쁨은 요란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역사를 바꾸고 우리를 서로 더 가까이 이끌어 주는 기쁨입니다. 교회가 5월의 마지막 날에 묵상하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이 내포하고 있는 신비가 바로 이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표상입니다. 동정 마리아와 사촌 엘리사벳이 만났을 때, 우리는 그 만남에서 ‘마니피캇’이 흘러나오는 것을 봅니다. 은총을 입은 하느님 백성의 노래가 터져 나오는 것을 봅니다.
방금 우리가 들은 독서 말씀들이 우리 가운데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해석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무엇보다 복음(요한 17,6.14-19)에서 예수님께서는 임박한 죽음에 짓눌려 계시지 않습니다. 끊어지거나 미완성인 채로 남아 있는 관계들 때문에 낙심하고 계시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성령께서 그 위태로운 관계들을 더욱 굳건하게 만드십니다. 기도 안에서 그 관계들은 죽음보다도 더 강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개인적 앞날을 염려하는 대신, 이 땅에서 맺으신 모든 관계를 아버지의 손에 맡기십니다. 우리도 그 관계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전해진 것도 바로 이런 관계의 끈을 통해서입니다. 세상이 이 끈을 약하게 만들 수는 있어도 완전히 끊을 수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서품자 여러분, 이제 여러분도 예수님처럼 살아가십시오! 하느님께 속한다는 것, 하느님의 종이요 하느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우리를 땅과 연결시켜 줍니다. 이상향이 아니라 현실의 세상과 연결시켜 줍니다. 예수님처럼, 아버지께서 여러분의 여정에서 만나게 하시는 사람들도 살과 피를 가진 구체적인 존재들입니다. 그들에게 여러분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십시오. 그들로부터 멀어지지도 말고 홀로 고립되지도 마십시오. 여러분이 받은 선물을 특권으로 여기지도 마십시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여러 차례 우리에게 경고하신 바와 같습니다. 자기 자신만을 바라보는 마음이 선교 정신의 불꽃을 꺼뜨린다고 하셨습니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외향적입니다. 예수님의 생애, 수난과 죽음, 부활이 모두 외향적인 것처럼 교회도 그러합니다. 여러분은 매 미사 때마다 예수님의 말씀을 자신의 것으로 삼게 됩니다.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라는 그 말씀 말입니다. 하느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셨고,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성자께서는 성부에 대한 해석이 되셨고, 살아있는 이야기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될 힘을 주셨습니다. 다른 것을 찾지 마십시오. 다른 힘을 구하지 맙시다!
예수님께서 어린이들을 받아들이시고 병자들을 낫게 하시는 손을 얹는 동작, 곧 안수 행위가 여러분 안에 주님의 메시아 직무에 담긴 해방의 권능을 새롭게 하길 빕니다. 조금 후에 우리가 거행하게 될 그 안수는 사도행전에서 창조주 성령의 전달로 묘사됩니다. 이처럼 하느님 나라는 이제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오게 하여 여러분의 개인적인 자유를 공동체 앞에 내어놓게 하고, 여러분의 지성과 젊은 힘을 예수님께서 당신 교회에 전하신 기쁜 선교사명에 접목하게 합니다.
우리가 제1독서에서 들은 에페소 공동체 원로들에게 한 말에서 바오로는 모든 선교사명의 비결을 전해줍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을 양 떼의 감독으로 세우시어 교회를 돌보게 하셨습니다”(사도 20,28 참조). 주인이 아니라 목자로 세우셨습니다. 선교사명은 예수님의 선교사명을 뜻합니다. 그분께서는 부활하신 주님이시고, 따라서 살아계시고 우리보다 앞서 가십니다. 우리 중 그 누구도 그분을 대신하도록 부름받지 않았습니다. 주님 승천 대축일은 우리에게 그분의 보이지 않는 현존을 가르쳐 줍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신뢰하시고 우리에게 자리를 내어주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시기까지 하십니다.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요한 16,7). 사랑하는 서품자 여러분, 우리 주교들도 여러분을 선교사명에 참여시키면서 자리를 내어줍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신자들과 모든 피조물에게 자리를 내어주십시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피조물과 가까이 계시며, 그 안에서 우리를 찾아오시고 놀라게 하십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우리가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경계를 그어서는 안 됩니다.
성 바오로의 감동적인 고별사에서 또 하나 강조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사실 이 말이 다른 모든 것에 앞서 나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내가 그 모든 시간을 어떻게 지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사도 20,18 참조). 이 표현을 우리 마음과 정신에 깊이 새겨둡시다! “여러분은 내가 어떻게 지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삶의 투명성입니다. 알려진 삶, 읽혀지는 삶, 신뢰할 만한 삶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백성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신뢰할 만한 증언으로 그들 앞에 설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함께 교회의 신뢰를 회복해야 합니다. 상처받은 교회가 상처받은 인류에게, 상처받은 이 세상에 파견되어 다시금 신뢰를 얻어야 합니다. 우리는 아직 완전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믿을 만한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상처를 보여주십니다. 그 상처는 인류가 당신을 거부한 흔적이지만, 주님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이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분은 오늘도 우리에게 당신의 숨을 불어넣으시며(요한 20,22 참조) 우리를 희망을 전하는 사람으로 세워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아무도 속된 기준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2코린 5,16). 우리 눈에 부서지고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들이 이제는 하느님과 화해하는 표징으로 다가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2코린 5,14)! 그것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누구도 소유물로 여기지 않게 해줍니다. 소유하려 하지 말고 자유롭게 해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이보다 더 크고 소중하며 나눌 수 있는 보화는 없습니다. 나눌수록 더욱 풍성해지는 유일한 보화입니다. 하느님께서 외아들을 내어주실 만큼 사랑하신 이 세상에 우리가 함께 이 보화를 가져다줍시다(요한 3,16 참조).
잠시 후 사제로 서품될 이 형제들의 삶이 얼마나 의미 깊은지 모릅니다. 이 형제들에게 감사드리고, 모든 이가 사제직을 지닌 하느님 백성을 섬기도록 그들을 불러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참으로 함께 하늘과 땅을 잇는 다리가 됩니다. 교회의 어머니이신 마리아 안에서 이 공동 사제직이 빛을 발합니다. 낮은 이들을 높이 들어 올리고, 세대와 세대를 하나로 묶으며, 우리를 행복하다 일컬어주시는(루카 1,48.52 참조) 그 사제직이 빛납니다. 믿음의 어머니시요 희망의 어머니이신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번역 이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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